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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철이의 추천 명곡 15선
1. 킹 크림슨 - I Talk To The Wind 킹 크림슨의 초기 걸작으로, 중세 음유시인의 분위기와 아트록의 공식적인 결합점을 제시한다. 피트 신필드의 작시, 그렉 레이크의 목소리, 이언 맥도널드의 연주 등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탐미주의의 극치에 도달하면서도 절제의 미덕을 동시에 지닌 걸작 2. 포리너 - Juke Box Hero 포리너의 장기인, 팝과 록의 두 어장이 교차하는 한류와 난류사이의 음악의 해협에서 노련한 어부의 솜씨로 건져올린 수륙양용의 양서류 음악. 거친 파도 사이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잡는 베테랑들의 솜씨를 보라. 3. 트러스트 - Le Mitard AC/DC의 본 스콧의 지원으로 세계에 알려진, 흔치 않은 프렌치 메탈 밴드 트러스트의, 솔직히 말하면 유일한 걸작. <라 마르세유>의 폭력적인 가사에서 보이듯, 프랑스어가 시적이고 아름다운 언어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 노래가 증명한다. 4. 라우드니스 - Esper (Japanese ver.) <디스일루전> 앨범은 라우드니스의 상업적 대성공에 힘입어 훗날 영어 버전으로 재녹음되었다. 그리하여 이 앨범이 라우드니스 최초의 영어 음반이 되지만, 그들의 진수는 오히려 일본어 버전에 있다. 트러스트의 프랑스어 메탈이 둔탁한 둔기에 의한 연속 타격이라면, 라우드니스는 날카로운 흉기의 질감을 가진 일본어를 헤비메탈에 얹어 일찌감치 메탈의 글로벌화를 실현했다. 5. 티렉스 - Cosmic Dancer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 삽입되면서 재발견된 티렉스의 걸작. 글램록 밴드의 음악적 역량을 얕보는 얼치기 록팬들에겐 통렬한 일격이다. 6. 퀸시 존스 - Ai No Corrida 산업주의 댄서블 음악의 완성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린 마스터피스. 디스코, 펑크, 게다가 재즈와 현대음악의 요소를 버무린 거장의 여유로운 윙크. 자동차로 치면 롤로이스 사나 벤틀리 사에서 만든 스포츠카랄까. 7. 카메오 - Word Up 콘, 건 등의 록밴드들이 리메이크하기도 한 댄스음악의 걸작. 록의 기준을 전기기타의 유뮤나 보컬의 창법 등에 두고 있는 우리나라 음악 마니아들에겐 낯설겠지만, 이 노래는 록을 비트로 파악하는 서양인들에겐 록넘버로도 분류된다. 8. 맥스웰 - Till The Cops Come Knockin 온몸이 녹아드는 듯한 끈적거림과 음탕한 가사. 어른의 음악이란 이런 것. 타고난 싱어란 이런 것. 9. 프린스 - 1999 흑백 음악의 최소공배수를 찰나의 감으로 추출한 프린스 유의 미니멀 음악. 천재란 이런 것이다. 10. 비사지 - Fade To Grey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할리우드에서 앞다퉈 묘사하기 훨씬 전에 만들어진 테크노-뉴웨이브-신스팝의 걸작. 고전 SF의 느낌이랄까. 퇴폐와 염세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나 댄서블의 비트와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11. 앨런 파슨스 프로젝트 - Day After Day 우리나라에서 만큼 널리 알려지지 않은 앨런파슨스 프로젝트의 숨은 노래. 재미있는 것은 애비로드의 수석엔지니어인 앨런 파슨스가 담당했던 가장 유명한 두 밴드. 비틀스와 핑크 플로이드의 냄새를 동시에 풍긴다는 것. 12. AC/DC - Hells Bells 세상엔 가끔 유행의 물결 저 위에서 비웃음을 던지는, 영원히 변치 않는 아이템들이 있다. 할리 데이비슨, 기네스 맥주, 그리고 AC/DC. 그들은 등장 당시부터 이미 백화점이 아니라 앤틱숍에 진열될 모습으로 나타났다. 13. 밥 말리 앤드 더 웨일러스 - Get Up, Stand Up 밥 말리의 노래는 그 가사를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남국의 휴양지와 어울리는 영원한 태평가다 .그러나 그 가사를 음미하고 나면 그의 목소리는 확연히 분노로 흔들리는 영혼의 깊숙한 떨림으로 다가온다. 14. 펄프 - This is Hardcore 오아시스의 상업성, 블러의 지성, 일스의 의외성을 동시에 갖춘 펄프.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저 스틱스만큼이나 과소평가된 밴드다. 15. 인큐버스 - Stellar 진정한 의미의 창작이 고갈된 21세기 음악계에선 원액 제조자보단 블렌딩 기술자가 대우를 받는 법. 젊은 블렌딩 마에스트로들의 영악함과 믿기지 않는 노련함을 보라. 출처 : 마왕 신해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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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란 무엇인가?
“음악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질문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던진다면 십중팔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음.........당연히 살겠지.” “이런 쁑~새끼. 당연히 살지, 그럼 뒤지냐?” 여기서 중요한 건, 음악이 없으면 인간은 과연 사는가 죽는가에 대한 입장 표명이 아니다. 중요한 사실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편이 훨씬 더 멋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아유~ 음악 없이 어떻게 살아요?” “어휴~ 그런 삭막한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어요.” 이 얼마나 쿨해 보이고 멋지구리해 보이며 인생을 즐기는 듯 여유 있어 보이느냐 말이다. 불행하게도, 거의 예외 없이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자에 해당하는 대답을 한다. 그러고는 별 미친놈을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질문자를 바라본다. 그리고 아니꼽게도, 후자와 같이 멋지구리하게 대답하는 사람은 거의 다 선진국에 사는 양놈들이다. 자, 그렇다면 정말로 음악 없이, 한 발 더 나아가 예술이란 것없이 인간이 생존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고찰을 씨부렁거려 보자. 먼저, 질문을 살짝 비틀어보겠다. ‘인간에게 예술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다소 엉뚱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찾은 대답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나보다 앞서 수백 년 혹은 수천년 전에 다른 어떤 새끼가 한 말일 수도 있다. 멋있는 말은 반드시 어떤 놈이든 먼저 하게 되어 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다.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있다면 내가 이렇게 구성태이에 쭈그려 앉아 글을 쓰고 있을 이유도 없고 당신이 당신 삶에 일절 도움이 되지 않을 이 책을 읽고 있을 이유도 없다. 일단 당신과 나, 둘이서 점당 천원짜리 맞고를 이십만 년쯤 친 다음, 저녁을 느긋하게 십오만 년 쯤에 걸쳐 배불리 먹고, 밤에는 나이트클럽에 가서 오십만 년쯤 부킹을 하다가, 이백만 년쯤 늘어지게 자면 그만이다. 물론 나이트에서 자리잡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나이트 웨이터들이 임시휴무, 동해안으로 팔십오만 년간 엠티 갔음' 이라는 종지쪽지를 붙여놓고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벽에 똥칠을 박박 해대며 백 년을 살겠다고 발버둥쳐도 허무하게 촛불 꺼지듯 사라져가는 것이 가련한 인간의 목숨이다. 인간의 목숨을 잡아늘이고자 하는 시도는 인류의 역사에 걸쳐 꾸준히 그리고 집요하게 있어왔으나 그 대부분은 추태로 비칠 뿐이었다. 대개 권력자들이 그러했다. 현세에서 아쉬울 것이 없었던 그들은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현재의 목숨을 잡아늘여 기득권을 연장하거나 혹은 내세에서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고자 했다. 태양의 아들, 이집트의 파라오는 너무나 아쉬울 것이 없었던 나머지 죽은 자신의 시체에서 창자를 꺼내 줄넘기를 하고 뇌수를 꺼내 국 끓여 먹은 후 나머지 시체에 약품 처리를 하고 붕대를 둘둘 감아 언젠가는 다시 일어나기를 염원했다. 그러나 역대 파라오 중 일어난 새끼는 한 놈도 없다. 만약 당신이 미라의 일어나는 장면을 어디선가 본 듯하다면, 지나친 할리우드 영화 감상일변도의 취미를 좀 자제하기를 권한다. 다시 말하지만, 도로 일어난 미라 새끼는 없다. 출처 : 마왕 신해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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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스트,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 후기
말도 많고 탈도 많고 우여곡절도 많은 공연이였다. 그런 만큼 보람도 있었던 공연이였다. 특히나 서울 공연을 참관한 관객들이나 기자들이 공연 내용에 대해 매우 후한 평점을 준 것은 정말이 많은 사람들의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넥스트와 로열 필하모닉 공연의 대단히 중요한 포커스 중 하나는 ‘오케스트라의 편곡을 어떻게 가져갈 것이냐’ 하는 것인데, 사람들의 추측과는 달리 대부분의 오케스트라 편곡은 국내 스태프들의 힘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날 관객들에게 매우 많은 사랑을 받은<도시인><먼 훗날 언제가><내 마음 깊은 곳의 너> 메들리 만이 로열 필하모닉 측 편곡자의 작품이었다. 오케스트라 편곡을 위해 세 명의 편곡자가 번갈아 투입되었으며, 애초 오케스트라와의 어레인지를 염두에 두고 작곡하는 나의 습관을 생각하면 나 역시 편곡자 중 하나로 간주될 수도 있겠다. 스코어 체크의 임무를 맡은 김세황이 너무나 여러 번 어레인지에 대해 퇴짜를 놓는 바람에 편곡자들의 스트레스가 폭발 직전까지 갔던 것도 다 잘해보자고 한 짖이고, 밴드 전체가 런던으로 이동해서 미리 리허설을 가진 것이나 서울에서의 리허설 시간이 유독 넥스트에게 많이 할애되었던 것도 다 그런 맥락일 것이다. 몇 가지 비하인드 스토리를 풀어놓겠다. 그날 공연을 감상했던 사람들에게는 꽤 재미있는 애기들이 될 것이다. 클래식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대중음악인을 천시하는 것은 유독 우리나라가 심하다. 그렇지만 서양의 뮤지션들 경우에는 자신이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는 음악은 클래식과 마찬가지로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는데, 로열 필하모닉의 경우에는 런던 리허설 전 까지는 넥스트를 약간 깔보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도 사실. 그러나 리허설에서 일반 유행가와는 구조가 크게 다른 넥스트의 곡들을 연주해보고서는 분위기가 왕창 바뀌었다. 확실히 대우를 좀 해주는 느낌이랄까. 한국 관객 중 유독 넥스트의 팬들이 보이는 격렬한 반응에 대해 로열 필하모닉은 사실 무척 당혹스러워했다. 세계 여러 곳에서 수많은 연주회를 하지만 그런 광기와 소음 속에서 공연을 하는 일은 드물다는 것이다. 리허설 당시에는 이수용의 드럼 소리가 너무 크다든지 전기기타 소리가 자신들의 연주에 방해가 된다든지 하는 불만을 제기해왔으나, 관객들이 길길이 날뛰는 대구 공연을 겪은 이후 그러한 항의가 완전이 없어졌다. 오히려 우리 분위기에 자신들이 맞추는 쪽으로 대단히 빨리 고집을 꺾은 것이다. 재미있게도 로열 필하모닉 단원들 중 상당수는 넥스트의 팬이 되었다. 넥스트의 시디를 요구하는 단원이 너무 많아 공연이 끝난뒤 '너네 대가리 숫자만큼 런던으로 부쳐주겠다'고 약속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김세황과 데빈이 상당수의 여성 로열 필하모닉 단원들과 주소,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 등을 교환하는 것을 목격했는데, 본인들은 '한-영 친선 차원의 교류일 뿐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휘자인 폴 베이트먼은 사회적 지위와 채신머리를 포기한채 넥스트가 그를 관객에게 소개할 때 점프하는 세리머니를 선보이질 않나, 매우 들뜬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리허설 초반의 신경질적이며 권위적인 모습과는 매우 다르게 바뀌어 있었다. 심지어 그는 넥스트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방송국과 인터뷰중인 넥스트의 대기실 앞에서 이십 분 이상 기다리는 이례적인 모습도 보이는 등, 한번 친해지면 상당히 프렌들리해지는 영국 신사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출처 : 마왕 신해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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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하게 된 이유
누가 나에게 음악을 왜 시작했냐고 물어보면 몇 년 전까지는 광징히 멋있는 이유를 찾아 대답하곤 했다. 예를 덜어, ‘내가 음악을 원한 것이 아니라 음악이 나를 원해서(과대망상이다)’ ‘산이 저기 있기에 단지 올라갈 뿐(대답 안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신은 무에서 유를 창조했지만, 인간은 최소한 유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있기 때문에9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그러나 그 질문에 솔직히 답하자면 ①달리 할 일어 없어서 ②사는 게 지루해서 ③그냥 재미있어서 등등의 이유가 될 것이다. 소년 시절부터 나는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전형적인 성공적 인생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 어떠한 종류의 삶도 배설과 삽입, 수면과 식욕이라는 요소를 생각하면 진부해지며, 결국은 죽음이라는 똑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사실 나는 죽음 이후에 더 관심이 많았지만, 과학적으로 검증될 수 없는 부분에 매달려서 내가 본 적도 없는 신에게 죽은 다음에도 살게 해주세요 따위의 패러독스를 지껄이면서 구걸하고 시픈 마음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닌데 먼저 자살을 하는 따위의 바보짓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기왕에 인생의 전제 조건이 수명은 유한하다, 라는 것이라면 그 시간을 가장 바보같이 보내는 방법은 목을 매달 것이냐 따위의 문제로 그 시간을 보내는 일이다). 그래서 내게 중요한 문제는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죽음의 그 순간까지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가장 덜 지루할까 하는 것이었다. 나의 청소년 시절에는 폭주족도 없었고(만일 있었다면 폭주족이 되었을 것이다),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섹스를 하기에는 겁이 너무 많았고, 부모님에게 반항하기에는 우리 부모님은 인간성이 너무 괞찮아서 트집 잡을 부분이 별로 없었고, 내 친구들은 너무나 착했다. 그래서 결국 할 일이라고는 음악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나에게 있어서 좋은 영화의 기준이란, ①우주선이 몇 대 등장하는가 ②로봇은 나오는가 ③하다못해 광선총이라도 쏘는가 ④이것저것도 아니라면 예쁜 여자라도 나오는가(그리고 노출의 정도는?) 정도이며, 누군가 예술적인 프랑스 흑백영화를 소개해준다면 나는 로봇이 나오는지 이리저리 돌려본 후, 쿨쿨 잘뿐인 취향이다. 하여 내게 인생이란 우주선도 로봇도 광선총도 나오지 않는 지루한 한 편의 영화였던 것이다(여자는 나온다). 이 지루한 인생이라는 흑백 필름을 가끔씩 우리는 천연색으로 칠하고 싶어한다. 색칠할 수 없다면 최소한 색안경이라도 끼고 본다. 작가 무라카미 류는 언제나 내게 예상치 못했던 멋진 색안경을 제공해 준다. 그의 책에는 항상 섹스와 마약과 폭력을 동반한 상상력과 터부가 넘쳐나는 공간이 있고, 그 공간은 애당초 천연색으로 촬영된 필름이 아닌 지루한 흑백의 일상을 색칠해보고자 하는 욕망으로 채워져 있다. 뭐 해석이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지만 이건 내 생각이니까. 그는 위에 열거된 금기시되는 요소들을 대담하게 건드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항상 모든 요소는 우리 일상의 지루한 요소들에 발을 붙이고 있고 그렇기에 공허한 일회성 일탈의 쾌감을 느끼게 해주는 데서 더 나아가 결국에는 칼날을 우리 스스로에게 돌린다. 나는 무라카미 류라는 작가 개인에 대해서 대략의 프로필 이외에는 어떠한 정보도 갖고 있지 않다. 그의 글에서 얻은 그에 대한 이미지는 호기심에 찬 눈을 반짝거리는(그러나 머리는 상당히 좋은) 악동이며 그는 세계를 구성하는 어떠한 요소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옛 성인들의 말씀이나 훌륭한 책에서 뭔가를 배운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삶에서 흔히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요소를 통해서도 인간은 무언가를 배울 수 있으며, 그가 이야기꾼으로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많은 스토리는 인간을 둘러싼 부정적인 요인들, 인간이 두려워하는 금기들, 인간이 못 본 체하고 싶어하는 사실들이 싫은 인간을 교육시키기 위한 신의 고차원적인 세팅임을 보여준다. 출처 : 마왕 신해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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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궤도 첫 앨범이 탄생하기까지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보내고 멤버들은 현찬의 집 지하실에 다시 모였다. 전원 찰진에다 퀭하니 맛이 간 얼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골때리는 상태에서 우린 그냥 얼굴을 마주보며 낄낄댔다. 그리고 잠시 동안의 회의에서 팀의 방향은 이제 명확히 결정되었다. 원래는 대학가요제를 마지막으로 나를 제외한 멤버들은 음악을 그만두기로 했던 것인데, 언감생심이라고 그랑프리를 탄 이상 아마도 앨범을 제작하는 데 무리 없는 상황이 될 것이고, 밴드를 만은 이상 최소한 앨범을 하나 남겨야 하지 않겠느냐하는 것이 중론이었다. 나 역시 고생고생해온 멤버들과 어떻게든 레코드를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이 대학가요제보다 우선하는 목표였고 당연히 뛰 듯이 기뻤다. 자신들의 인생에서 프로페셔널로 또 전업 작가로의 길을 배제하고 있는 친구들과의 밴드인 이상 언제가는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당연히 피할 수 없는 길이기는 하지만, 언제 뛰어들어도 뛰어들어야 할 그 갓막한 쇼 비즈니스의 세계보다는 그저 즐거운 친구들과 같이 밴드를 하는 것이 당시 나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자 기쁨있었다. 레코드사를 선정하고 매니저를 선택하는 일은 리더인 나의 몫으로 남겨졌다. 그리고 그 ‘쇼 비즈니스’ 개시 하루 만에 상황은 우리의 상상과 백팔십 도 다름이 밝혀졌다. 대학가요제 출전 당시 우리를 목격하고 제작자가 되어주겠다는 의사를 밝힌 곳은 무려 삼사십 군데가 넘었다. 그들은 어찌어찌하혀 내 전화번호를 알아 내기도 하고, 방송국 프로듀서를 통해서 연락을 해 오기도 했는데, 커피숍 같은 곳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그 진행상황이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내가 버스에서 내려 호텔 커피숍(그들이 지정한, 나로서는 평생 처음 가보는, 그리고 한쪽 구석에서는 한복을 입은 아줌마들과 정장을 차려입은 남녀가 앉아 맛선을 보고 있는 괴상한 장소)으로 들어가면 그들은 뛸 듯이 반겨 맞으며 십 년 된 지기인 양 인사를 한다. 그러고는 첫마디가 “저런, 스타가 버스를..... 안 될 말 이지. 너 차가 있어야 겠구나. 네가 좋아하는 기종이 뭐니?” 뭐 이런 허파에 바람 넣기성 멘트다. 물론 나야 뭐 기타니 신디사이저니 이런 물건들을 들고 버스 운전사 양반들의 온갖 박해와 박대를 받으며 다닌 지 오래니 솔직히 말해서 귀가 졸깃하지 않은 바는 아니었다고 불어야겠다.. 그르나, 그르나 말이쥐 다음 멘트로 넘어가면 그야말로 확 깬다. “C피디한테 얘기 들었는데, 너 솔로 할 거라면서. P씨도 그렇게 이야기 하던데.....” 그래서 눈을 꿈벅꿈벅 하면서 이게 웬 문지방에 좆 낑기는 소리인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아뇨오오오. 전 밴드 할 건데요오오” 하고 대답하면, 그래 더 필요한 악기는 없니, 음악 방향은 어떻게 잡고 있니, 밤무대가 수입이 살벌한 건 알고 있지, 내가 CF계에 아는 사람이 오방많아 하고 날아다니던 그 많은 멘트가 전부 쏘옥 들어가고 침묵만이 흐른다. 그러고는 설득의 멘트가 몇 개 더 나오는데 종류별로 나열하자면, 철째는 너는 아직 뭘 몰라 형, 둘째는 나도 예전에 그거 해봤는데 그거 답 안 나와 형, 셋째는 언제 보따리 싸도 쌀 건데 미련 버려 형 등등 대학가요제 출전 당시에도 그렇고 레코드사를 찾아 헤매던 당시에도, 내가 넥스트를 만들던 무렵에도, 그리고 현재까지도 밴드가 찬밥을 먹는 것은 민간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내가 솔로 싱어로 나설 거라는 것을 전제로 '곧 네놈들은 땅을 치게 될 것이다'라고 중얼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완강하게 몇 번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리면 그들은 곧 참, 선약이 있는데 잊어버렸네, 혹은 오 그래, 그러면 내가 검토해보고 다시 전화하지 하는 말을 남기고 총총히 사라지며, 나는 다시 홀로 버스에 올랐다. 대학가요제가 끝나고 한 달간은 골때리는 경험의 연속이었다. 우리는 주관 방송사인 MBC의 TV와 라디오 프로그램 몇 개에 출연했으며, 특히 잡지사 등으로부터 우리와의 취재를 요청하는 엽서가 쇄도해 상당히 많은 분량의 인터뷰를 소화해내야 했다. 출처 : 마왕 신해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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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가요제 참가와 그대에게
무대 위에서 몇 번의 경험을 쌓고 나자 전 맴버는 놀라운 변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표정에 후까시가 살벌하게 잡히기 시작한 거다. 무대 위에서 절대 웃지 않으며 마치 ‘나 공연 오천 번 해바써, 사인도 좀 해줘써’ 뭐 이런 표정이었는데, 사실 공연이 끝나면 다른 팀 순서에서 대기실에 안 있고 공연히 공연장 입구를 왔다갔다 하면서 사인해달라는 사람 없나 돌아다니다가 그날 밤 연습실에서 “쿠하하, 난 사인 세 장 해줬다” “웃기지 마, 바부팅이ㅑ! 난 다섯 장 해줬다!” 하고 추태를 부리는 게 당시의 우리의 즐거움있었다. 하지만 팀 한편에 어두운 그림자도 적지 않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설정한 방향, 간단하게 말해서 여러 프로그레시브 밴드들과 팝이 겹치는 영역에서 우리가 활동할 공간은 오버에도 언더에도 없더라는 것이었다. 레코드사에서는 꼴통 언더 밴드 취급을 받았으며, 언더 밴드들에게는 부르주아 학생 밴드 취급을 받았고, 대학 서클 밴드들에게는 잡탕 연합 서클 취급을 받았다. 당시는 발라드가 국내를 완전히 평정한 때여서, 앨범 한 장에 발라드 아홉 곡에 구색 맞추기용 빠른 노래 한 곡이 들어 있는 시스템이었는데, 그렇게 가는가 아니면 말도 안 되는 영어로 올 메탈 판을 하나 만들고 매우 비겁하게 보이는 우리말 발라드(일명 록빙가.‘록’ 발라드를 ‘빙’자한 완전 ‘가’요)를 하나 싣든가..... 전자를 택하느냐 후자를 택하느냐 둘 중 하나밖에 없었다. 그 건택에 따라 판을 오만 장쯤 팔 수 있는 꿈을 꾸든지 삼천 장 팔고 만족하든지 팔자가 정해지는 거였다. 판 팔리는 수가 의미하는 게 금전적인 수입이 아니라 활동 영역이라고 볼 때 우리가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어디에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 여기서 우린, 제 삼의 선택을 해버린다. 라면집에서 튀김라면을 때리던 중 한 놈이 “야, 우리 대학가요제나 나가자” 하고 말해버린 것이다. 모두 비웃는 투로 크게 냐하하하 하고 웃은 후 ‘다꽝’을 대렸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전 멤버가 대학생이질 않은가. 참가 자격이 되는 거였다. 사람들이 잘 이해 못하는 부분인데 우린 우리 스스로를 ‘대학생 밴드’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그냥 그 당시 언더 신에 있던 수백 개 반드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팀만 전 멤버가 우연히 대학생이라는 것을 빌미로 하여 대학가요제라는 권모술수로 상황을 타개하기가 참으로 쪽팔렸다. 어떡하겠니, 살 놈은 살아야지. 1대 베이스 양두현이 음악 해서 배고프게 살기 싫다고 일리노이 주립대로 떠나버리고(사실 그놈이 떠란 건 딴 이유에서였지만 핸들 잡은 놈이 짱이니 이제 복수할란다), 2대 베이스 조현곤이 가입한 지 얼마 안되었을 땐데, 갑론을박을 거쳐서 원서 접수 마감 날 조형곤이 원서를 내고 왔다, 웃긴 것은, 절대 그런 웃기는 짜장 행상에 참가할 수 없다던 강경파들도 마감 당일에 두 시간 늦자 “원서 못 내는 거 아냐? 어떡하지?” 했다는 거다(애들은 애들이다). 출처 : 마왕신해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