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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내 꿈
어릴 때 나의 꿈은 번데기 장수였다. 이 때문에 주위 가족 및 친족(몇 번이나 얘기하지만 울 아부지 십 남매, 나는 그냥 남매, 게다가 고모 삼촌들이랑 같이 살았다). 관공서(래봤자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로부터 갖은 압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굳건히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철아, 철아, 넌 커서 뭐가 될래?" 하고 고모들이 나를 빙 둘러싸고 물어보면, 나는 굼벵이, 늘보, 금복주라는 별명답게 "뻐어어언데에에기 자앙수우우~"하고 늘어지게 대답했는데, 그러면 고모들은 폭소와 함께 떽떼굴떽떼굴 굴러다녔고(고모들은 당시 틴에이저였음), 엄마가 고함을 질러서 중단시킬 때까지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심지어는 학교에서도 '나의 꿈'이란 주제로 발표할 때, "저의 장래희망은 뻐언데에기 장수입니다"라고 말했다. 순간 폭소가 쏟아졌고 나는 비웃음 속에 파묻혀 마치 기죽은 찰리 브라운처럼 터벅터벅 내 자리로 돌아가곤 했다. 일시적으로 왕따가 된 나는 놀이터 그네에 걸터앉아 "뻐어언데에기 자앙수가 어때서어어..."하고 중엉걸리곤 했는데, 어쨌든 1970년대 어렵던 시절, 고단백 영양 공급원인 번데기는 부모들에게도 각광을 받던 시기여서 골목길에 번데기 장수의 "뻐언~"하는 소리가 들리면 어머니는 어김없이 내 손에 동전을 들려주었다. 위생? 불결하지 않느냐고? 지랄마라. 변변한 장난감 없이 진흙탕 속을 뛰놀던 강북 어린이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번데기 먹고 배탈나는 건 '곱게 자란 놈'들이나 하는 짓이지, 나야 뭐... 여기서 번데기 장수의 사업적 비전과 골목길을 지배하는 강렬한 카리스마에 대해 논해보자. 골목길에 "뻐언~"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면 동네 아이들의 귀는 쫑긋 선다. 번데기 장수의 출현시 항시적으로 자금 지원을 받도록 엄마와 묵계가 되어 있는 나 같은 경우는 눈썹을 휘날리며 "엄마, 엄마아~ 뻔!"하고 외친 뒤 동전을 받아들고 총알같이 튀어나간다. 나처럼 스테디한 스폰서가 없는 옆집놈의 경우는 절규와 울음을 토해내며 엄마와 상당 시간 실랑이를 벌여야 하고, 놈이 나타났을 때는 우린 이미 신문지로 싼 번데기 한 봉을 입에 홀랑 털어넣고 국물을 쪽쪽 빨고 있는 '상황 종료' 상태다. 골목길에서 번데기 장수의 존재는 그야말로 특급스타 수준인 거다. 게다가 대부분의 번데기 장수들이 문어발식 사업 확장으로 뽑기 장수와 엿장수를 겸업하는 경우가 많아, 울트라 번데기 장수의 경우는 세 개 기업군을 동시에 운영하는 '총수'인 셈이다. 나의 야심 역시 번데기 장수를 기반으로 하여(소라는 다른 기업이 아니고 뻔데기 파트에 예속된 서비스 품목의 경향이 강하다) 뽑기 장수로 사업을 확장하고(기업 이미지상 '달고나'라는 호칭이 더 사업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내 나이 일곱 살), 최종적으로는 화려한 퍼커션 사운드를 무기로 골목을 공략하는 엿장수까지 병합하는 게 최종 목표였다. 출처 : 마왕 신해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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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프로필
이름 신해철 나이 29세 이후 정지. 언급하지 않으며 화제에 올리지 않고 신경도 안씀. 정신연령 뛰어난 탄력성을 자랑하며 특히 타킷인 여성의 연령에 따라 적절히 변화함. 전자오락 할 때, 만화책 볼 때(공각기동대 같은 것 말고 닥터 슬럼프) 열 살 이하로 떨어지며 메탈 들을 때 십대, 여자 꼬실 때 이십대, 스트립바 들어갈 때 삼십대 등등으로 변하며 매니저들에게 매우 권위 있는 목소리로 오늘은 몸이 좀 안 좋아서....내일부터 일하지, 라고 말할 때는 육십대 이상으로 변함. 신장 그래 씨X놈들아, 나 작아...고등학교 때 신체검사에서 171센티미터가 나온 이후로 고의적으로 한 번도 다시 재어보지 않았다. 나, 쪼그매서 손해본 거라고는 중3 때까지 버스 손잡이가 잡히지 않아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등하교ㅗ한 것 하나밖에 없다. 근데 웃긴 건 그래서 내가 키에 대해 콤플렉스가 있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인데, 별로 개의치 않는다고 말해도 "그래 그럼 그렇겠지"라고 하면서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심지어 어떤때는 이 사람들이 왜 이렇게 내가 키에 대해 콤플렉스가 있기를 열망하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갈 때가 있다. 굽 높은 신발 신는 거? 너네 키스 공연 비디오 안 봤지? 걔넨 다리가 짧아서 18센티미터짜리 구두 신는 줄 아니? 그건 말이쥐, 운동화 신고 공연하기 싫기 때문이쥐....끈 풀어지면 걸려서 넘어진다구... 외모 중 자신 있는 부분 알고 있는 대답이겠지만...거의 모든 부분(휘유우~ 찬바람 분다). 재미있는 사실. 내 팬들 중 단기성 팬들은 내 입술을 좋아한단다(왠지 야하다). 중기성 팬들은 코를 좋아한다. 장기성 팬들은 백이면 백 눈을 가장 좋아한다. 그리고 내 여자친구들은....다 좋아한다. 쿠하하. 코에 관한 에피소드. 사실 난 어렸을 때 미륵돼지였다. 볼때기가 늘어져서리 별명이 금복주였고, 코는 볼 사이에 파뭍혀 보이지도 않았다. 국민학교 고학년 무렵 우리집이 망해서 중학교 때 사진이 딱 두 장뿐인데(졸업사진 포함) 그나마 그 사진 아니면 코 성형수술한 걸로 오해받게도 생겼다. 실은 중1 무렵 거울을 보고 좌절하여 꽃미남은 바라보지도 않으니 코라도 좀 어떻게 솟게 해주시오 하고 성당에서 기도했는데(아시겠지만 이러한 것은 진정한 종교 행위가 아니다), 일년 뒤 학교에서 주먹코, 혹은 성룡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래서 너무 커졌다 싶어 다시 성당으로 가서 15퍼센트만 줄여달라고 기도를 한바, 오늘날의 코가 되었다. 눈에 쌍꺼풀도 만들고 싶었으나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에 나오는 과욕은 좆을 부른다, 라는 교훈을 생각해내고 그건 기도를 안 했다. 오늘날, 특히 일본 사람들이 나를 보며 당연히 코를 성형했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서 한민족으로 태어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출처 : 마왕 신해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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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나
내가 <아버지와 나>라는 노래를 만든 적이 있어서 아버지의 캐릭터는 상당히 많이들 짐작하고 있는 것 같다. 뭐, 전형적인, 말 없고 무뚝뚝하고 고집 센 소위 ‘한국적’인 아버지 말이다. 그럼 여기서, 덜 한국적인 우리 엄마 얘기를 잠깐 하자. 우리 엄마는 노처녀 될 때까지 간지러운 서울 남자들을 무시하 며 박력과 카리스마의 사나이 말런 브랜도나 과묵의 사나이 찰턴 헤스턴을 꿈에도 그리다가 우리 아버지가 비슷한 캐릭터인 줄 알 고 완전히 속아서 결혼해 신세를 조지신 분이다. 소녀시절에는 가 야금이나 피아노 레슨을 애타게 받고 싶어하는 등 예술적인 면에 무지하게 관심을 기울였으나 나중에 기생 되려고 그러느냐는 외 할아버지의 더 무지한 견제(정확하게는 폭력)에 제지당해 분루를 삼켰던 전적이 있으며, 문학가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고 국문과에 진학하였으나, 웬걸 시는커녕 애새끼들 기저귀 갈다가 날 샌 분이다하여 환갑이 넘은 현재 아트 비스무리한 거랑은 꽃꽃이 강사 자격증 달랑 한 개 제외하고는 여전히 무관하시며, 외손자를 본 이후에는 다시 탁월한 육아 및 가사 전문가로 돌아가 출가한 누나 네 집에서 무급 파출부 생활을 자청하고 있는 물건너간 청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 엄마가 상당히 안 한국적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나에 뒤지지 않는 구라로 상당히 명망이 있는 엄마가 일생에 걸쳐 날린 몇몇 멘트들은 여자 공자나 노자 혹은 사이비 예수에 근접하는 매우 수준 높은 것으로서, 당신의 경험과 한국이라는 땅에서의 여자로서의 삶이 절절이 녹아든 후에 길이 빛날 울트라 슈퍼 판타스틱 구라라 할 만하다. 내가 어릴 적엔 길거리에 걸인들이 꽤 많았다. 특히 등곳길에 오가는 육교 밑에는 매일같이 걸인들이 나와 있었는데 엄마가 십원짜리를 손에 쥐여주며 저 아저씨 동전 그릇에 놓고 오너라 하면 나는 얼굴이 상기되어 동전을 손에 꼭 쥐고는 종종걸음을 쳐 거지 아저씨의 동전 그릇 안에 십원짜리를 얌전히 떨구고는 “감사합니 다” 하고 인사까지 한 후에 엄마 치맛자락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인사를 했던 이유는 그 걸인이 남에게 베풀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세상살이란 게 온갖 해괴한 일이 다 일어나는 만큼 오죽한 사연이 있으면 저리되었겠느냐고 측은히 여길 줄 알라고 배웠던 것 이다. 그런데 길을 걷다보면 정말 황당하게도, 반짝거리는 옷을 입고 아이 손을 잡은 젊은 엄마가 아이에게 저 사람은 공부를 못해서 저렇게 되었으니 너도 저렇게 되면 큰일난다 하고 풍얼대는 꼴을 보게 된다. 아이에게 그런 초라한 사고를 가르치는 것도 꼴보기 싫지만 어차피 자기 자식 스케일 작아지는 것은 자기 손해라치고, 내가 정말 기분 나쁜 것은 그 걸인이 듣는 앞에서 마치 들으라는 듯이 그런 천박한 소리를 늘어놓는 상스러움이다. 또 길에서 불구인 걸인을 보면 돈을 주지만 사지가 멀쩡한 청년 걸인을 보면 호통을 쳐준다는 말을 자랑스럽게 하는 아줌마를 본 적이 있는데, 지극히 제3공화국적인 발상이 아닌가 한다. 선진국 길거리에 도걸인은 있으며 또 그들의 대부분은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육체보다는 정신적으로 사회에 적응하기 힘든 상태에 있 는 경우가 더 많으며, 심지어는 종교적 철학적 이유로 그러한 삶 의 방식을 선택한 경우도 소수이긴 하지만 존재한다. 안 도와주면 말 일이지 호통까지 칠 것은 무에 있겠나. 그저 십원짜리 하나 보태줄 셈이라도(하긴 요새 거지는 십원짜리 주면 욕하겠지...) 내가 남을 도왔다는 우쭐함을 느끼지 않고 저 사람이 나에게 도울 기회를 줬으니 그가 부처요 성인이다, 라고 생각하면 그만인 것을 (솔직히 울 엄마는 부처가 아니라 예수라고 그랬다. 근데 분위기 상 부처에 더 어울리는 얘긴 것 같다). 내가 중학생 때 집안 살림이 어려워져 끼니 잇기가 곤란하자, 어린 마음에 가세에 씨알만한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특히, 우리집이 꽤나 잘살 때도 몸이 허약했던 엄마는 기름보일러에서 연탄아궁이로 살림이 바뀌자 연탄가스에 가끔 실신도 했는데, 엄마는 당신이 드러누우면 집안 꼴이 더 아수라장 이 될까 염려하여 맘대로 앓아눕지도 못했다. 출처 : 마왕 신해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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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에 관한 아주 사소한 것들
신해철의 광팬이 아니라면 전혀 관심이 가지 않을 아주 사소한 것들. 그러나 신해철과 정말 친한 사적인 친구라면 당연히 조만간 알게 될 수밖에 없는, 그러나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자잘한 이야기들. 당신이 바쁜 사람이라면 이 글은 잃지 않는 것이 좋다. 그는 다한증이다. 한겨울에도 손에서 땀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무대 위에서 기타를 연주하면 손에서 떨어진 땀이 뜨거운 조명에 말라붙어 허연 소금밭으로 변한다. 당연히 모든 기계는 망가진다. 피아노, 클라리넷, 기타 그 어떤 악기도 능숙하게 연주할 수 없는 큰 이유이다. 날 때부터 이런 것은 아니었고, 세살 때 녹용을 잘못 먹어서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불면증이다. 신경정신과에서 장기 치료를 받았으며 보통 3개월정도로 끝나는 투약을 2년 가까이 계속 받았다. 신경안정제와 수면제 없이는 하루에 단 세 시간도 자지 못한다. 그는 의학적으로 정신병자에 분류된다. 원인은 '모욕감에 대한 강렬한 반발'로 정신 감정을 해볼 경우 모든 것이 정상으로 나타나지만 단 하나, 자신이 이유 없는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할 경우 강렬한 적개심을 넘어서 살인 충동에 가까운 공격성을 나타낸다. 그는 마징가 제트다. 오른팔, 왼팔이 모두 로켓 펀치 수준으로 빠진다. 5킬로그램 이상 중량이 나가는 물건을 들 경우 팔이 빠져버린다. 날 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고, 왼팔은 교통사고로 오른팔은 모터보트 사고로 이 모양이 되어버렸는데, 당연히 군대에 갈 수 없는 몸이지만(수류탄 던지려다가 팔이 빠져서 아근 참호에 그게 떨어진다고 생각해보라) 연예인 군대 비리가 사회 이슈이던 시절, 국방부 장관 특별 지시로 강제로 끌려갔다. 출처 : 마왕 신해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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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종교가 없다.
나의 어릴 때 별명 중 하나는 똥개였다. 아이 별명을 일부러 천하게 부르는 경우가 옛날 분들 가운데 왕왕 있는데, 나도 그런 경우 중 하나였다. 누나의 별명이 '아가'였던 데 비해 극심한 역차별을 받는 경우인데, 동기야 좋든 나쁘든 엄마+아빠+고모 삼촌 9명+가끔 할아버지 등등 여러 수십 명이 '똥개야'하고 불러대면 아이의 정서가 피폐해진다.(그래서 지금 이 꼴이다). 그다음 별명은 특징도 없고 유치하기만 한 '해팔이'로서 소리나는 대로 '해파리'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불알친구들은 나를 그렇게 부른다. 그리고 한참 세월이 지난 다음 얻은 별명이 교주인데, 콘서트장의 광경을 보고 기자들이 붙인 것이다. 그 안에 포함되는 있는 유머러스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어이~ 신교주~'하고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내 자신 그렇게 싫어하지도 않지만 뭐 그렇게 좋아한다거나 자랑스러워하는 별명도 아니다. 어차피 진짜 교주도 아닌데다 결정적으로 부채 소녀들도 없고 칠선녀도 없지 않은가(거 왜 있잖은가, 교주 의자 뒤에 서 있다가 부채질도 하고 밤에는...밤에는...밤에는... 자장가도 불러주는...). 웬만큼 센스가 있는 분은 당연히 알겠지만 이 교주라는 말 자체가 '사이비 종교 교주'라는 말을 줄인 거나 다름없어서, 이미지가 무소불위, 전횡, 음탕, 탈세, 신도 재산 착복, 여신도 추행, 불법 납치 및 감금 등의 단어를 포함한다. 사람들이 "그래, 그 좋교 이름이 뭐요?"하고 킬킬대며 물어보면, 나 역시 지지 않고 오극교니 지간교니 하고 맞받아친다(오극교: 오입극략교를 일컬음. 설명 불필요. 지간교:지옥간부교를 일컬음. 군대를 사병으로 가지 않고 장교로 가는 것을 선호하듯이 어차피 지옥 갈 거라면 간부 코스로 가서 유황불에 타는 게 아니라 유황불에 타는 놈 쇠스랑으로 찌르고 못 나오게 괴롭히며 지옥의 행정에 협조하는 지옥간부를 길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서론이 오방 길었다. 그래서 이 챕터의 얘기는 뭐냐... 종교 야그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난 종교가 없다. 단지 뭐든 종교에 대해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하며 어떤 것이 최선의 선택인지 알아보려던 것인데, 생각보다 방황이 길어져 오늘날까지 왔다. 어린시절부터 십 년이 넘게, 그것도 매우 중요한 사춘기 시절을 성당에서 보냈으므로 정서적으로는 천주교 냄새가 많이 남아 있으며,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에 대해 모두 감탄할 점이 있다고 생각하고, 힌두교는 매우 매력적이고 드라마틱한 종교로서 좋아하고, 심지어 우리나라 기독교계가 벌레 보듯이 하는 여호와의 증인도 배우 존경할 점이 많다고 생각하며, 통일교 역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출처 : 마왕 신해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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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나
유치원에 들어가기도 전의 일이니까 대략 1972년 정도일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가족은 서울 도봉구 미아4동 55-66번지에 살고 있었다. 지금의 내가 현재 살고 있는 집 주소, 전화번호도 기억하지 못하는 준치매의 인간인 것을 감안하면 어린 시절 살았던 집에 대한 기억이 번지수뿐 아니라 구조, 마룻장의 재질, 방안의 비치던 채광의 정도, 대문 색깔, 초인종의 위치에까지 이르는 것은 무척이나 신기한 일이다. 누나가 태어났을 당시 분윳값 대기도 벅찼던 우리집 사정은 새벽 여섯시에 출근해 회사 마당 청소로 일과를 시작하던 아버지의 오버액션에 가까운 분전에 힘입어 조금씩 호전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고,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열 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아버지는 수입이 늘어나는 대로 알토란 같은 어린 동생들을 하나둘씩 서울로 불러올려 공부를 시킨다는 계획을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그런 성실성과 주렁주 시동생들의 뒷바라지를 불평 없이 해내는 어머니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라는 건 당연히 새빨간 거짓말이고,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해가 뜨면 골목으로 뛰어나가, 윗도리만 입고 동네를 활보하던 코찔찔이들과 흙장난, 술래잡기, 다방구 등의 유희를 진탕 즐기다가 TV만화가 시작되는 오후 여섯시에 집으로 칼 같이 퇴근하는 꼬마 한량이었다. 그 시절, 나는 동네 골목에서 거의 황제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다소 웃기다. 노처녀가 되도록 문학소녀 같은 어울리지 않는 감성을 가지고 있던 어머니는 ‘경상도 사나이’인 아버지의 ‘박력’에 뻑이 간 나머지, 나긋나긋한 서울 남자들을 버리고 울 아부지에게 투항, 곧 식 을 올리고 ‘No 처녀’가 되었는데, 젠장, 그 ‘박력’이란 게 ‘폭력’과 별 차이가 없으며 낭만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더라는 것 이다. 이왕 엎질러진 물, 돌이킬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이 가공할 X같은 유전자를 당연히 물려받았을 것으로 예상되는 아들놈만큼은 온순한 성격으로 키우고 싶었던 어머니는 ‘아이를 지나치게 깔끔하게 키우면 성격이 신경질적이 된다’는 이론을 신봉하여, 내가 방 정리를 하든 말든 밖에 나가 진흙탕 속에서 구르고 오든 말든 절대 야단을 치는 법이 없었고, 하루에 옷을 세 번 네 번 갈아입혀야 했음에도 짜증을 내는 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장맛비가 오는 날, 물웅덩이를 마구 철벅거리며 돌아다니다 심지어 그 속으로 슬라이딩까지 할 수 있는 과감성을 동네 만방에 떨쳤으며, 모래 장난을 할 때면 흙더미 속에 대가리까지 파묻고 질식할 때까지 발버둥을 쳤고, 복개공사가 되지 않아 흙탕물(사실은 똥물)이 흐르는 개천에서 유유히 수영을 즐길 수 있는 동네 유일의 인간이었다. 출처 : 마왕 신해철